이번 소재를 문서 상단에 적고 시작하니 꼭 내가 구제불능의 불평불만꾼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슬몃 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한번쯤은 이 화두의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세계와 인간이 합일되어 있던 신화의 시대를 지나 역사 시대로 접어들면서 어쩌면 필연적인 일일 테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에 따라 세계에 아무 불만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계의 횡포를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잇지 못하는 사람까지의 스펙트럼이 있을 것이다. 나를 둘러싼 주위 환경을 세계라고 할 때, 나는 세계에 비굴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며 유년 시절을 통과해온 것 같다. 지적 호기심이 많아 집에 있는 책은 물론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도 그 집 책장에서 눈길을 잡아끄는 책을 붙들던 어린이는 독서에의 열정에 과하게 사로잡혀 또..
교사의 신정은 삼일절이다. 送舊迎新, 묵은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는다는 새해의 본질을 생각하면 업무와 학년이 정해지는 2월은 그야말로 옛 것은 가고 있는데 새 것이 아직 오지 않은 어정쩡한 시기이다. 익히 떠들고 다녔지만 희망 업무도, 학년도 튕긴 사람은 심지어 짐까지 쌌다. 작년에 새로 바꾼 책상과 서랍 등 사무공간을 떠나 최소 10년은 넘게 쓴 것 같은 삐걱대는 집기들이 가득한 학생부실로 말이다. 작년과 동일하게 유임을 희망했는데 우선 업무가 인권담당, 학교폭력 책임교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3학년을 맡을 경우, 3학년 담임들을 모두 본교무실에 배치해 의사소통의 신속성을 높이려는 공간 배정의 취지에 맞지 않게 되었다. 학생부로 이사가게 된 이상 자동으로 1, 2학년 중 선택해야 하는데 작년 ..
가 극장에 걸려있던 2018년 3월은 기간제 일을 그만둔 직후였다. 퇴직하며 아파트를 비우고 본가로 거처를 옮기면서 원가족과의 갈등이 재발하기 전이었다.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스트레스가 쌓일 터라 공부에 오롯이 집중하기 어려울 거라 스스로를 달래며 바뀐 생활에 적응하려 애쓸 무렵이었다. 에서 김태리 배우의 매력에 반했던 차에 그의 신작이 나온다니 기대를 품고 앉았다. 주인공 혜원은 중등 도덕윤리 임용시험에서 수 차례 고배를 마시고 엄마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으로 돌아온다. 혜원이 회상하는 노량진에서의 날들, 허겁지겁 편의점 도시락이나 분식을 먹으며 허기를 때우는 모습이 온기 없는 도시 생활에서의 표류자 같아 보였다고 할까. 처음으로 집에 돌아와 끓여먹는 배춧국이 눈에 들어왔는데 까닭 모를 눈물이 고..
해가 지는 걸 보면 아쉽다가도 때가 되면 다음 날의 해가 뜨듯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려면 야외 활동만한 게 없는데 코로나19가 2020년을 송두리째 삼킨 터라 새순이 나고 봄꽃이 피고 신록이 빛나고 매미가 우는 시간을 마스크와 함께 실내에서 주로 보내야 했다. 단풍이 물들다 지고 서리가 내릴 때도, 눈이 내리고 해가 토끼 꼬리만큼 짧아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밤낮 기온의 오르내림으로도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야 있다. 그렇지만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 등 방역 대책 속에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상황에 지친 동료 시민들의 얼굴에 가득한 수심을 보면 작년은 온통 혹독한 겨울 같다. 코로나19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일자리를 잃거나 영업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어려움과는 무..
화장실에서 이런 문장을 보았다. “마음이란 참으로 신기합니다. 내게 속한 것이면서도 내가 온전히 할 수 없어 두렵기만 합니다.”라는 문장이었다. 아마도 화장실 환경 개선을 위해 학생자치회 임원들이 문구를 고르고 손글씨로 꾸민 것을 코팅한 것이겠지. 평범하게 옳은 말이기에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동족들보다 저 문장이 시선을 잡아챈 건 늘상 하는 고민이 담겨 있어서다. 하루에도 열세 번씩 널을 뛰는 마음을 어르고 달래서 얌전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마음의 문제는 같이 울어줄 사람이 있다고 해도 결국 본인에게 귀속된다는 점에서 스스로 돌볼 방법을 궁리하고 시도해나가야 한다. 마음을 돌보는 방법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요가가 떠오른다. 11월에 목 디스크 진단을 받고 재활 운동을 알아보다..
참 얄궂다. 물론 세상의 부침이 내 사정을 보아가며 와줄 리 없지만 말이다. 동기들보다 늦어지는 취준으로 매년 연명하며 괴로워했던 2010년대 후반부를 뒤로 하고 올해는 산뜻한 마음으로 출발해볼까 했었다. 유래 없는 역병이 돌아 2020년을 송두리째 빼앗기다니 지금도 악의 가득한 농담이라고 생각하고만 싶다. 그래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열흘 뒤면 새로운 해가 다가온다. 일 년간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올해 잘한 일은 무엇이고 아쉬웠던 일은 무엇인지와 같은 나를 향한 질문들에 답하며 이번 년도를 매듭 지어보고 싶다. 올해의 나는 늘 그렇듯이 자신에게 더 좋은 사람이고 싶어하면서 타인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스스로에게 많은 부담을 지웠다. 나를 잘 돌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걸 머리로는 똑똑..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욕망을 가리켜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으로 정의한다. 부족이란 필요한 양이나 기준에 미치지 못해 충분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고 충분하다는 건 모자람이 없이 넉넉하다는 뜻이니 욕망이란 내게 모자란 것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알아 열등감만이 날 움직이는 걸”이라고 노래한 가수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사랑과 함께 인류 문명을 밀어온 두 축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내게 모자란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둘 꼽아보는 것은 나의 욕망을 관찰하는 일과 같다. 나의 욕망 첫번째는 외모에 대한 것이다. 성인 남성 평균에 못 미치는 키에 대한 불만은 청소..
MBTI가 인간 성격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처음 검사한 십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는 두 가지는 외향성과 사고형이다. 몇 해 전, 십 년 가까이 적을 두고 있는 모임의 워크숍 때 진행한 ‘칭찬 카드 만들기’에서 J가 건네준 “가장 먼저 말을 할 수 있습니다.”는 내 성격을 잘 드러낸다. 여기 덧붙이자면 가장 먼저 말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지막까지 말을 잘 듣기도 한다. 오랜 친교를 나눈 L이 ‘너는 good listener다. 그건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장점이다.’라고 칭찬해줬었는데 어쩌면 그 얘기를 듣고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노력을 더욱 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요즘 말로 ‘인싸’였던 내 피처폰 연락처에는 ‘학교’ 그룹 안에 500명의 연락처가 있었다. 복학해서도 학생회, ..
며칠 전 신한은행에서 발간한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를 읽다가 한 방 먹은 듯했다. 우선은 올해 기준 대한민국 가구 총자산의 76%가 부동산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거기 더해 1인가구인 나의 소득 구간은 대략 2구간에 해당하는데 해당 구간의 평균 자산은 1억 190만원이고 그 중 부동산은 4,894만원이라니, 나는 당장 먹고 죽을래도 없는 돈이 대체 누구의 주머니에 들어있다는 것인지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문제는 격차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매년 수출액이나 해외여행 출국자의 수는 최고를 경신하는데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절대 빈곤으로 내몰리고 기초생활수급자 내지 차상위계층에 머물며 자산 증식의 기회를 봉쇄당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난다는 통계 자료를 보았다. 그런 와중에도 일 년 사이에 ..
욕하면서 닮아간다는 우리말이 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그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오죽하면 부처님께서도 생선을 싼 노끈에서는 비린내가,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기가 나기 마련이니 곁에 있는 사람을 잘 두라고 하셨겠는가. 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없고 선택하지도 않은 주변 사람의 대표 주자인 원가족을 생각해 보자. 미디어에서 안온하고 사랑으로 가득한 공간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톨스토이의 유명한 구절처럼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세상에 둘도 없는 끔찍한 가정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면도 미워하는 면도 떼어낼 수 없이 뒤섞인 원가족을 생각하면 그래서 마음이 복잡해진다. 원가족 중에서도 양육자들은 더더욱 각별하다.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한 사람들이고 혈연으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