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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TI가 인간 성격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처음 검사한 십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는 두 가지는 외향성과 사고형이다. 몇 해 전, 십 년 가까이 적을 두고 있는 모임의 워크숍 때 진행한 ‘칭찬 카드 만들기’에서 J가 건네준 “가장 먼저 말을 할 수 있습니다.”는 내 성격을 잘 드러낸다. 여기 덧붙이자면 가장 먼저 말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지막까지 말을 잘 듣기도 한다. 오랜 친교를 나눈 L이 ‘너는 good listener다. 그건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장점이다.’라고 칭찬해줬었는데 어쩌면 그 얘기를 듣고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노력을 더욱 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요즘 말로 ‘인싸’였던 내 피처폰 연락처에는 ‘학교’ 그룹 안에 500명의 연락처가 있었다. 복학해서도 학생회, 동아리, 스터디, 실습 등 갖은 인연으로 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터라 같이 다니던 B는 “○○이랑 다니면 삼보일배하는 거 볼 수 있어.”라고 장난스레 말하기도 했다. 세 걸음을 뗄 쯤이면 또 다른 사람과 인사하곤 했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워낙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그 속에서 힘을 얻어가는 성격인 데다가 졸업반 직전까지 여러 활동을 병행하다 보니 자연스레 주위에 늘 사람들이 북적였다.  

 

 그렇게 폭넓은 인간관계를 이어가던 것이 이제는 전생의 일처럼 느껴진다. 졸업 이후 몇 년의 삶은 계약직 또는 취준생이었고 그래서인지 새로운 관계 형성에 소극적이었다. 그야말로 필요에 의해 만난 관계들이 수없이 스쳐갔다. 내 삶이 자리잡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으니 타인을 향한 에너지를 쏟기가 힘에 부쳤다. 사실 관계라는 건 타인을 상대하는 일 이전에 나를 상대에게 비춰보는 일일 테니 어쩌면 자신이 없고 위축된 내 모습이 싫어서였을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오래된 인연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계속 연락이 닿고 한 해에 한 번씩이라도 얼굴 보며 안부를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올해 2월, 최종합격 소식을 받을 때 자리를 함께 해준 G의 부친상 부고를 직접 받고 한밤중에 부랴부랴 움직인 것은 체력과 시간이 허락하는 한 반드시 얼굴을 마주하고 위로를 전해야만 하는 자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때 양육자들보다 더 믿고 따랐으나 동지들을 뒤로 하고 숨어버린 K의 모친상 부고에, 종례를 부담임에게 부탁하고 조퇴해서까지 다녀온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한번 맺은 인연을 귀히 여기고 남에게 버림받을지언정 남을 버리지 않으려는 이 태도가 대체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와 대면하게 된다. 중학교 3학년 때 앞선 2년 간의 학교생활 속에서 사이가 멀어진 학생들과 한 반에 모였었다. 직전 해에 반장이었던 게 무색하게, 별 이유도 없이 반 분위기를 주도하는 학생들에 의해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고 당시 선행학습으로 풀며 늘 가방에 넣고 다니던 수학의 정석 표지 뒷면에 그 해의 남은 수업일수를 세며 버텼다. 

 

 인간관계에서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는 것 정도는 안다. 다만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예의바른 무관심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관계 안팎에서 일 년간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경험을 하고 나니 무리 안에서 배척받는 것에 대한 공포와 거부가 인간관계 형성의 기저에 깔렸다. 지금은 잊혀진 학과의 악습을 총회에서 문제 제기하고 폐지를 위한 투표를 붙이고 싶었지만 모두에게서 손가락질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입을 얼어붙게 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라면 과내에서 목소리를 냈어야 하지 않냐는 다른 과 친구의 지적에 과거의 상처를 꺼내 보이며 이해받고자 했지만 그런 아픔을 가진 건 안타깝지만 그게 지금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학부 새내기를 과대표로 시작하고 학생 자치 기구와 동아리 활동으로 대학 생활을 꽉 채우며 과 안팎에서 좋은 사람들과 안정된 관계를 형성했다. 그 덕에 지금은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마음의 상흔 정도로 남았다. 그렇지만 새로 적응해야 하는 낯선 상황에서 관계에 어려움을 느낄 때면 언제고 다시 덧나 욱신거린다. 올해 발령받은 소속교에서도 전입자 여선생님들끼리만 커피 외출을 나가는 걸 보고 용기를 내 다음에는 저도 같이 나가고 싶다고 알려달라고 했으나 그러겠노라 한 대답은 그때뿐. 입장을 뒤바꿔놓고 생각하면 눈치 없이 끼어 불편하게 하는 이겠다 싶어서 이제는 단념했다. 

 

 그래도 바로 관계에 대한 결단을 내리는 순간에는 과거의 나보다는 한층 성장했다고 느낀다. 이런저런 경로로 만난 사람들이 나를 존중하지 않고 내게 해가 된다고 여길 때는 과감하게 그와의 인연을 정리할 수 있다. 고등학교 동창으로 현 집권당의 지지자, 테크덕후이면서 나꼼수류를 신봉하는 H는 총선에서 내가 정의당의 류호정 후보를 지지하는 걸 알고 ‘대리게임녀’ 운운을 그치지 않길래 더 얘기가 무의미하겠다 생각하고 차단했다. 대외활동 중에 친분을 쌓은 C는 대화 중 본인이 받은 상처를 토로하며 나를 몰아세우는 일이 잦았다. 결국 이 관계가 나를 더 괴롭게 한다고 느끼고 관계를 정리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게 된 건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먼저 지난 괴로움이 켜켜이 쌓여왔고 눈 내린 숲에서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듯 여기저기 삐고 까지고 멍들어온 내 마음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만족스러운 나도, 몸서리치게 싫은 나도 결국 나라는 인간의 여러 가지 면 중 하나일 뿐이다. 나에 대한 미움과 싫음을 쌓아갈수록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는 걸 생각하고 그 전보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기로 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되니 시간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달라졌다. 지나간 시간들부터 삶의 보탬이 되는 교훈을 얻고자 살피되 무용한 후회는 그만두었다. 얼마 전 감명 깊게 읽은 <라틴어 수업>의 한 구절처럼,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겠지만 오늘을 행복하게 산 사람의 내일이 불행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가올 날들에 대해서도 걱정을 위한 걱정보다는 지금 최선의 행동을 하고 닥칠 일들은 그 때 가서 겪어내며 맞서자는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런 태도를 인간관계에도 원용하려니 오는 관계도 가는 관계도 막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전에는 버려지는 것과 공격받는 것을 모두 인간관계에서의 위기로 인식하고 피하고자 하는 집착이 있었다면 거기서 조금은 자유로워진 마음이다. 

 

 또 “너만 손해야.”라는 생각을 한다.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영상에서 무대에 오르기 직전 긴장하는 동료에게 H가 건넨 말이다. 긴장으로 떨면 무대를 온전히 즐길 수 없고 그럼 결국 즐기지 못한 이만 아쉽다는 얘기다. 그런 뜻이지만 당시 인간관계를 대하는 내 자세에 관해 고민이 많던 내게 이 문장은 주문처럼 다가왔다. 내가 마음에 안 들어?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거든. 다정하고 유쾌한, 맛있는 가게를 많이 알고 함께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고 자부해. 서로 성향이 맞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그걸 넘어 나를 내치려고 한다면 그건 너의 자유지만 너만 손해야. 같은 자신감. 하지만 나를 지키기 위한 마음의 코어근육과도 같은 인식이다. 

 

 물론 맘 속의 큰 평수에 살던 사람들이 나를 떠나는 순간은 아무리 겪어도 초연해질 수 없다. 그래도 이전에는 내가 뭘 잘못했지?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와 같은 질문들에 붙잡혀 끝없이 땅을 파고만 있었다면 지금은 언제까지고 거기 머물지 않는다. 속상함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어쩔 수 없지 하며 입을 삐죽 내밀고, 그리고 더 그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이런 자세에도 그림자는 있다. 내가 그간 관계에서 쏟은 마음과 시간 등 자원들에 대한 아까운 마음이다. 베푼 사실조차 잊으라고 말한 붓다의 가르침을 떠올리면 응당 내게 유익할 것 없는 생각이다만 미욱한 중생은 아직 번뇌의 그물에서 허우적댄다. 

 

 비록 올해의 인간관계 역시 마음처럼만은 되지 않아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지만 이 또한 내 삶 속에서 지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또 올해 트위터 교사 계정을 운영하면서 생각과 경험을 나누고 밀도 있는 시간을 함께 향유할 수 있는 선생님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2020년을 미리 결산해볼 때 가장 멋진 일이다. 앞으로도 인간관계를 결점 투성이인 나의 거울로 삼고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주위 사람들에게도 좋은 벗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잘 돌보고 나의 소소한 행복을 위해 적당히 애쓰고 싶다. 그게 인간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길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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