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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얄궂다. 물론 세상의 부침이 내 사정을 보아가며 와줄 리 없지만 말이다. 동기들보다 늦어지는 취준으로 매년 연명하며 괴로워했던 2010년대 후반부를 뒤로 하고 올해는 산뜻한 마음으로 출발해볼까 했었다. 유래 없는 역병이 돌아 2020년을 송두리째 빼앗기다니 지금도 악의 가득한 농담이라고 생각하고만 싶다. 그래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열흘 뒤면 새로운 해가 다가온다. 일 년간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올해 잘한 일은 무엇이고 아쉬웠던 일은 무엇인지와 같은 나를 향한 질문들에 답하며 이번 년도를 매듭 지어보고 싶다.

 

 

 

올해의 나는 늘 그렇듯이 자신에게 더 좋은 사람이고 싶어하면서 타인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스스로에게 많은 부담을 지웠다. 나를 잘 돌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걸 머리로는 똑똑히 안다. 그렇지만 가정과 직장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생각은 생각과 행동의 중요한 잣대였다. 주위 사람들을 돕는 것은 멋진 일임에 틀림없지만 내 상황이 안정되지 않았을 때조차 그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심에 무리해 버리는 일이 왕왕 있었다. 학기 초 봉사활동 소양교육을 온라인으로 진행하게 되면서 방송계로서 촬영을 도왔는데 얼떨결에 영상 편집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 스쳐지나간다. 또 저축과 기본 생활비 제하면 빤한 지갑 사정인데도 외조부모님들께 때마다 용돈과 선물을 보내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얼굴도 떠오른다. 물론 성장 과정 전반에 걸쳐 어른들께 풍족하게 지원받은 건 사실이지만 보은도 형편에 맞춰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했다. 내년에는 좀더 이기적으로 굴고 싶다.

 

 

 

2020년의 잘한 일을 꼽아보자면 자취 시작, 운동 용품 구입, 전국일주 여행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자가용으로도 45분 남짓, 버스로는 편도 90분 이상 걸리는 출퇴근길에 질리고 본가에서 가족들이 주는 스트레스에 짓눌리다 등교개학 전, 짬을 내어 부동산 발품을 팔았고 적당한 거리의 오천만원 원룸 전세를 구했다. 5월 말에 이사했으니 벌써 자취를 시작한지도 7개월 정도가 되어 간다. 몇 해 전 마지막으로 자취하던 22평 아파트와 비교하면 거진 크기라 누굴 초대하기도 민망하지만 그래도 자전거로 10분이 채 안 걸리는 통근 시간 덕에 넉넉한 여유 시간 덕에 신경 써서 음식을 해 먹을 수 있고 아침저녁으로 짬을 내어 운동도 하고 틈틈이 책도 읽을 수도 있다.

 

 

 

운동 용품 구입은 나를 위한 소비로 특히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코로나19 시국이 아니었다면 집콕은 집은 그저 먹고 씻고 자는 공간이라고 생각해 온 나와 거리가 먼 단어였을 테다. 시험 끝나면 다시 헬스장을 다니리라 다짐했지만 코로나19 상황이 심상치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친구 추천을 받아 2월 말에 구입한 17만원짜리 운동매트는 위에서 버피를 해도 층간소음을 발생시키지 않고 면적도 슈퍼싱글 매트리스 정도는 되어서 친구가 찾아오면 재우기에도 좋다. 러닝도 다시 시작하며 처음으로 지역 러닝 크루에 가입했는데 휴대폰을 들고 달리는 나와 달리 많은 러너들이 러닝용 스마트워치를 차고 있었다. 가격대가 만만치 않아서 한 달 정도 고민했지만 스마트워치를 산 만큼 더 열심히 달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6개월 할부(아직 끝나지 않았다)로 질렀다. 소감은 달리기를 좋아한다면 한시라도 더 빨리 사는 게 좋다는 추천이다. 아무리 휴대폰이 가볍다고 해도 들거나 주머니에 넣거나 달릴 때는 거추장스럽다. 없이 달리기 전까지는 그리 불편하다고 생각 안 했지만 막상 휴대폰으로부터 자유로운 두 손으로 달려보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여기 더해 무릎보호대도 샀다. 재작년 오버트레이닝으로 왼쪽 무릎 연골 파열 진단을 받고 수술한 이후 지금은 어느 정도 뛸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달리기 취미를 가지려면 보호대를 사용하는 게 좋다는 주위의 충고를 수용해 큰 맘 먹고 산 보호대는 확실히 사용하기 전보다 운동 후 몸에 무리가 덜 가는 게 느껴져서 지출한 보람을 느낀다. 이전이라면 당장 필요하지 않다며, 없어도 괜찮다며 애써 외면했을 것들이지만 내 몸과 마음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운동의 질을 높이는 것은 결국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테니 말이다.

 

 

 

코로나19가 이렇게 2020년을 지배하기 전에,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전국 일주 여행을 다녀온 것도 올해의 잘한 일이다. 일을 그만두고 임고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한 2018년부터 상반기에 경조사를 챙기는 외에는 친구들과 따로 만나지 못했다. 찐한 E형 인간인데다 역마살이 의심될 만큼 여기저기 다니며 먹고 마시는 데서 인생의 낙을 찾는 사람이지만 그런 시간들이 수험생에게는 사치이고 낭비라고 단정짓고는 두문불출 공부에 전념했다. 그렇게 두 해를 지나보낸 뒤 올 1월에는 홀가분하게 2차 시험을 치르고 나와서는 제일 먼저 전국을 돌아다닐 계획부터 짰다. 어느 날 어느 때에 어디서 지내는 누구를 만날지 정도만 정하고 미리 연락 돌려놓기, 잠은 보통 친구들 집에서 자지만 중간 경유지에서는 숙소 구하기 정도? 그렇게 본가를 출발해 세종-제천-태백-강릉-대구-김해-부산-울산-경주를 거쳐 다시 본가로 돌아오는 여드레 간의 국내여행을 했다. 짧게는 반 년, 길게는 이삼년씩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이들과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며 고생을 위로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맛있는 것을 먹으니 시험공부로 쌓인 독이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여행의 막바지였던 울산에서 합격 소식을 확인하고 다음 날 경주에서 느긋하게 대릉원을 산책하며 맛본 여유는 오래도록 그리운 순간일 것이다. 더군다나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적인 활동이 모두 제약되는 이 시기에는 특히나 더더욱 그 때의 여행이 잘한 일로 느껴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은 당초의 마감을 지나 크리스마스와 신정 사이다. 전형적인 연말인 동시에 크리스마스가 한 해를 마감하는 기념일인 걸 생각하면 어쩐지 가외로 받은 시간 같은 때다. 나는 이번 달 중순부터 수도권 전면 원격 수업으로 운 좋게 재택근무를 하며 생활기록부를 마감하고 졸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다 비협조적인 학생과 보호자 등 뜻하지 않은 일로 괴롭고 속상할 때도 있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감정 통제가 잘 안 되어 소리내어 엉엉 울기까지 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당시의 상황에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나니 나는 분명 마주한 상황들에 대해 적절히 대처했고 그 일로 내가 불이익을 겪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또 이 글에서처럼 한 해를 돌아봤을 때 나는 올해 충분히 최선을 다해 행복하려고 애썼다. 모두가 고생하는 코로나19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끈질기게 잘 살아보려고 힘을 낸 결과 원가족과 적절히 거리를 두며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꾸준한 운동으로 몸과 마음의 건강도 챙기고 있다. 3월부터 일하기 시작해 이만큼 중심을 잡고 즐겁고 신나게 살아가는 내가 너무 대견하고 기특하다. 내년은 더욱더 멋지고 가슴 벅찬 일들이 많을 것이라 믿으며 며칠 남지 않은 2020년을 잘 갈무리하기 위해 나태해지기보다 해야 할 일들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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