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앉아 있는 바위가 바로 천하의 중앙에 해당한다. 이형상 『남환박물』 오늘의 인용구를 읽자마자 제주 목사 이형상인가? 하고 검색했는데 맞다. 출전 자체가 '남쪽 벼슬아치가 쓴 박물지'라는 제목의 책이다. 제주의 무속 신앙을 혁파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어디까지나 조선조의 유교나, 해방 이후의 근대성 내지 합리주의, 기독교 신앙 등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야 미신이다. 아울러 그의 행적이 탐라의 폐단을 일소하고 개명을 가져왔다고만 평가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무속 신앙이 야기하는 여러 문제점이 있다. 당장 서문표의 일화를 떠올려보자. 그러나 서문표가 하백에게 지내는 제사에 젊은 여성을 바치는 악습을 일소한 것처럼 문제점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신당을 폐쇄하는 등 신앙의 순기능까지도 인정하지 ..
모든 발자국 가운데 코끼리의 발자국이 최고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 가운데 죽음에 대한 명상이 최상이노라. 『대반열반경』 팔만 사천 법문을 관통하는 단어를 꼽아보자면 그 중 빠지지 않는 것은 '비유'일 것이다. 석가도 예수도 뛰어난 교사였고 이들은 수강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효과적인 비유를 잘 사용했기에 그들의 메시지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영감과 위로를 주는 게겠지. 죽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최후의 단절이고 삶의 유한성을 확실히 해주기에 모두가 두려워하고 이야기하기조차 꺼려한다. 어쩌면 그렇기에 마음이 산란하고 어지러울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 하신 게 아닐까?
염소와 표범의 가죽옷 입은 소년은 어깨 위에 북방 매, 흰 솜 같은 깃털. 신흠 「눈이 내린 뒤에 사냥하는 매를 보고 짓다」 조선 후기 사대부 시조의 다변화를 보여주는 「방옹시여」의 작가를 일력에서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가죽옷, 매, 흰 솜 등 겨울 풍경을 떠오르게 하는 시어들이 제목과 잘 연결되어 한 폭의 수묵화를 감상한 느낌이다. 큰 추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소한보다 덜 춥다는 날, 하늘은 맑고 바람 없이 햇살이 좋아 이만 보 가량 걷기에 참 좋았다.
노을 위의 은빛 창문에서 구만 리 희미한 세상을 내려다보고, 바닷가 문에서 삼천 년 상전벽해를 웃으며 보고 싶다. 손으로 하늘의 해와 별을 돌리고 몸소 구천의 바람과 이슬 속을 노닐고 싶다. 허초희 「광한전백옥루상량문」 아직까지 교과서 등에서는 '허난설헌'으로 소개되지만 이제 어지간한 교양인이라면 모두 그녀의 이름을 안다. 시문으로 낙양의 종이값을 올렸다는 그녀는 뛰어난 재주와 별개로 변변찮은 남성이었던 김성립과 결혼했고 「규원가」(이 작품은 허초희의 작품이라는 설과 그녀의 동생, 허균의 첩이 지었다는 설이 경합 중이다)에서 드러나듯 괴로운 출가외인의 삶을 견뎌야만 했다. 거기 「곡자(哭子)」에서 엿볼 수 있는 자식들의 죽음까지 생각하면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우여곡..
스스로 신선 체질 지녔으되 자신은 모르고서 십 년 동안이나 지초 캐는 꿈을 꾸다니. 가을바람이 땅 흔들어 누런 저녁 구름 깔리누나, 숭양으로 돌아가 옛 선생을 찾으리라. 이상은 「동쪽으로 돌아가다」 처음 읽고는 엥 이거 완전 정철 아니냐? 생각이 들었다. 신선 모티브는 현실에서의 불만족이 투영되었거나, 자신의 풍류에 대한 자부심이 그만큼 크거나 둘 중 하나라고 배웠었는데, 궁금해져서 찾아봤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두목과 동시대인인 이상은은 관료로서는 불운했지만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시로 당대뿐 아니라 이후에도 숱한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전자였구나 하고, 한시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좀더 공부를 많이 해야 할 텐데 생각했다. 이렇게 방학처럼 시간과 정신의 여유가 있을 때 새..
한마음의 근원은 있음과 없음을 떠나서 홀로 깨끗하고, 삼공의 바다는 참됨과 속됨을 아울러서 맑다. 원효 「분별 없는 깨달음」 일체유심조!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지. 「천수경」에서도 '죄는 그 자체로 생기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며 악한 마음이 소멸된다면 죄업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했던 게 생각난다. 맑고 깨끗한 본성을 거울처럼 닦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려는 짬짬의 노력을 계속해간다면 스스로에게 더 떳떳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극락세계에 가기보다는 털 나고 뿔 달린 소가 되어 농사꾼의 농사일을 돕겠다. 『남전』 이것이 대승인가! 개인의 해탈을 추구하기보다 중생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는 자세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한편으로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우리네 속담이 떠오르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현세에서의 삶을 긍정하는 자세가 좋다. 지금 여기에서의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내세에서의 평안을 기원하는 종교적 소망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민중의 아편'과도 같이 사용된 역사도 있고 말이지.
자신의 직위에서 묵묵하게 근신하며 일하고 바르고 곧은 자들과 교제하라. 『시경』 그래도 세상을 조화롭게 굴러가게 하는 건 인용구의 주인공들이다. 종종 자기 일터에서 집중하기보다 대외 활동에 힘을 쏟으며 이름을 알리는 사람들을 볼 때면 드는 위화감도 인용구에 공감하기 때문이리라. 돌이켜보니 어느새 5년차가 되었고 그 시간들 속에서 위로와 지지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 나도 저렇게 나이 들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게 하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묵묵히 일하며 바르게 행동하는 곧은 사람들이었다. 고대 중국인들의 생활상과 사고를 엿볼 수 있는 고전 『시경』에서도 이런 시구를 수록한 걸 보면 어느 때고 인간사에서 삶의 지향으로 삼고 싶은 모습은 비슷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