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고 끝내는 능력이야말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재능이라는 이야길 언젠가 들은 적 있다. 사실 커서가 깜빡이는 흰 바탕 위에서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낸 경험이 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터, 반드시 훌륭한 것은 아니더라도 뭔가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압박에 우리는 발을 떼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발을 떼지 못하고 뿌리를 내리거나 소금기둥으로 화하는 것도 딱히 나쁜 결과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숨쉬고 살아가며 뭔가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풀이 되더라도 뚜벅쵸가, 소금기둥보다는 우유니로 환경을 바꾸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이 희망하는 방향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헌정을 짓밟고 구시대적 정경유착을 재현한 박근혜 대통령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9월 20일, JTBC가 재벌들이 출연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최순실 씨가 관여했다고 보도하면서 시작된 ‘최순실 게이트’는 ‘박근혜 게이트’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10월 29일부터 12월 3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주최 측 추산 최대 2백만 명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정치권 역시 민의에 따라 대통령 탄핵안을 9일 의결하기로 했으며 부결될 시 야당 의원 총사퇴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2008년 이명박 정부를 규탄하는 광우병 촛불집회 이후 이렇게 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온 것은 처음이다. 누군가는 서울 도심에 백만 명이 넘게 모이는데도 쓰레기가 없고, 경찰과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시위라며 자랑스러워하라고 말한다. 11월 1..
시사인 제467호의 커버는 “분노한 남자들”이라는 제목이었다. 천관율 기자는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 사태 이후 온라인 공간에서 폭발한 메갈리아 논란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을 수집하기 위해 대한민국 최대의 위키 사이트 “나무위키”의 ‘메갈리아’ 항목을 분석하였고 그것을 기사로 써내었다. 기사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메갈리아 현상은 ‘남성혐오’가 아니며 스스로를 ‘선함’과 ‘정의로움’으로 규정하는 남성들의 자의식은 최근의 워마드식 혐오 발화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작년 ‘메르스 갤러리’의 등장을 기점으로 주된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기에 흥미롭게 읽었다. 또한 혐오가 약자와 소수파를 낙인찍는 강자의 무기이기 때문에 ‘남성혐오’는 성립될 수 없다는 기존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
요즘 고등학교 1학년들은 ‘대화의 원리’라는 걸 배운다. 대화의 원리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준수해야 하는 규칙으로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이 중 ‘협력의 원리’가 있다. 이는 대화 목적에 성공적으로 도달하기 위해 각 단계에서 대화 참여자가 지켜야 하는 원리로 크게 네 가지 격률을 가지고 있다. 먼저 진실한 정보만을 제공하도록 노력하라는 ‘질의 격률’이 있다. 말하는 사람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거나 타당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을 때는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화제와 관련되는 말을 하라는 ‘관련성의 격률’이 있다. 이는 대화 상황에 적합한 말을 하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모호하거나 중의적인 표현을 피하고 간결하고 조리 있게 말하라는 ‘태도의 격률’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주인공인 ..
8월 5일(한국시간 6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의 마라카낭 주경기장에서 올림픽의 막이 올랐다. 이번 올림픽은 ‘새로운 세상’을 뜻하는 ‘뉴 월드(New World)’를 그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그렇지만 국내 미디어의 올림픽을 향한 시각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제3세계 국가에 대한 무성의와 편견, 뿌리깊은 여성혐오적 문화가 곳곳에서 드러났다. MBC 개막식 중계부터가 그랬다. 각국 대표단의 입장과 함께하는 자막은 ‘남아프리카공화국-넬슨 만델라와 다이아몬드’, ‘캄보디아-앙코르와트와 메콩강’, ‘이집트-고대 이집트 문명, 수에즈 운하’ 등 사회과 부도나 시사 상식 백과에서 인용한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나라’, ‘오랜 내전을 겪은 나라’ 등 해당 국가에 대해..
7월 18일, 게임 ‘클로저스’의 신규 캐릭터 티나의 성우 김자연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트위터) 계정을 통해 ‘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티셔츠를 입은 ‘인증샷’을 올렸다. 그리고 만 하루도 되지 않아서 ‘클로저스’의 제작사 넥슨 측은 그를 ‘퇴출’하는 결정을 발표했다. 이 결정에 대해 넥슨은 게임 이용자들의 우려 섞인 의견을 확인한 결과라고 밝혔다. 정의당 문화예술위원회, 노동당 여성위원회는 논평을 통해 넥슨의 이 같은 결정을 규탄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추모하고 여성혐오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페이스북 페이지 ‘강남역 10번 출구’ 역시 넥슨뿐 아니라 페미니스트 여성 전반의 생존권 문제를 외치기 위해 7월 21일, 홍대 나루수산 앞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힙합계의 뜨거운 감자인 가 최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2012년 첫 선을 보인 이 프로그램은 관객이 책정한 공연비로 승패를 갈라 우승자를 뽑는다. 힙합 음악의 대중화와 다변화를 가져왔다는 긍정적인 평과 함께 미디어자본의 개입을 바탕으로 한 공연시장 독점과 지나친 자극성 일변도라는 부정적인 평이 공존한다. 특히나 혐오 표현이 포함된 가사를 여과 없이 내보내는 문제로 여러 번 논란이 됐다. 지난 시즌의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송민호는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라는 가사로 여성에게 성적 모욕감을 준 것은 물론 산부인과 의사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대한산부인과의사회의 성명서에 직면하고 사과한 바 있다. 이번 시즌의 우승자인 비와이의 ‘F5’의 가사 중 “여성의 동성애는 분명 나로 인해 감소 왜냐면 내 Flow에 흥..
1900년대 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의 국내 개봉 소식에 6월 말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리고 6월 26일, 강변 CGV에서 40대 남성이 옆자리 여성 관객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한 후 현장에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소식을 듣고 여성참정권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를 상영하는 곳마저 여성 혐오범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생각에 멍했다. 좀 더 여유 있게 볼 생각이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져서 다음날 바로 영화관을 찾았다. 주인공인 가상 인물 ‘모드 와츠’는 불합리한 현실 속에 있으면서도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현재의 소소한 안온함에 매몰된 인물이다. 그렇지만 같은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남편은 모드보다 노동시간이 적고 건강에 무리가 덜 가는 배달을 하는데도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 또한..
지난 6월 30일, 새누리당 비대위가 불체포특권 포기를 의결했다. 또한 노회찬 의원은 7월 4일, “특권을 내려놓고 일하는 국회를 만들어야 한다.”며 세비를 절반으로 줄이자고 제안했다. 위 소식을 다룬 기사 댓글에서는 “불체포특권을 버리는 당이 국민의 마음을 살 수 있다.”거나 “세비가 OECD 3번째라는데 일하는 것 꼴찌고! 당연 세비 대폭삭감하고 국민 눈높이에 맞춰야지!”와 같은 시민들의 호의적 반응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의 정치혐오에 영합해 입법부를 위축시킬 수 있는 모든 시도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국회의원의 권한 축소만큼 여론이 통일되는 주제는 한일전 축구경기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언론도 잊을 만하면 국회의 낮은 생산성과 의원들이 받는 특혜 등을 열거하며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반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