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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가 극장에 걸려있던 20183월은 기간제 일을 그만둔 직후였다. 퇴직하며 아파트를 비우고 본가로 거처를 옮기면서 원가족과의 갈등이 재발하기 전이었다.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스트레스가 쌓일 터라 공부에 오롯이 집중하기 어려울 거라 스스로를 달래며 바뀐 생활에 적응하려 애쓸 무렵이었다. <아가씨>에서 김태리 배우의 매력에 반했던 차에 그의 신작이 나온다니 기대를 품고 앉았다.

 

주인공 혜원은 중등 도덕윤리 임용시험에서 수 차례 고배를 마시고 엄마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으로 돌아온다. 혜원이 회상하는 노량진에서의 날들, 허겁지겁 편의점 도시락이나 분식을 먹으며 허기를 때우는 모습이 온기 없는 도시 생활에서의 표류자 같아 보였다고 할까. 처음으로 집에 돌아와 끓여먹는 배춧국이 눈에 들어왔는데 까닭 모를 눈물이 고였다. 영화는 배춧국 외에도 계절의 변화와 함께 여러 음식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고 관객들은 혜원의 일년을 눈과 귀로 쫓으며 영사막 너머의 맛과 냄새까지, 어쩌면 질감까지도 함께한다.

 

극장을 나와 감자빵 같은 음식이 내게도 있던가 하며 좋아하는 음식들을 떠올려보았다. 작게는 임고생, 크게는 취준생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혜원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뜻대로 되지 않아 지치고 힘든 몸과 마음만도 서러운데 주위 사람들과의 비교를 스스로 하게 된다. 극중 끊임없이 펼쳐지는 집밥과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유대는 음식이 열량을 채우는 수단 이상의 무엇임을 말없이 웅변하는 듯하다.

 

나의 경우 원체 원가족 내에서 정서적인 지지와 위로를 받아본 기억이 드물다. 그렇지만 그건 서로 간의 거리가 필요했던 나의 이십대를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탓인 것 같다. 여양육자의 식탁은 늘 정성과 노력이 담겨져 있어온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리저리 맛있는 음식과 술을 쫓는 모험을 즐기는 내게 내면의 허기를 채워주는 음식은 따로 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평양냉면이다. 유진식당, 능라도, 을밀대, 우래옥, 정인면옥, 을지면옥, 광화문식당, 그리고 진미평양냉면까지. 일단 떠오르는 가게들만도 양 손을 모두 동원해야 한다. 가게마다 저마다의 매력이 있지만 공통점이라면 백석의 표현을 빌려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맛일 것이다. 오이를 못 먹는 터라 오이 빼고 달라고 꼭 얘기해야 한다. 주문과 함께 소주를 한 병 시키고 먼저 나온 소주를 한 잔 따라 마신다. 선주후면, 본래 남쪽보다 더 빨리 추위가 찾아오는 관서 지방에서 술로 몸을 데운 뒤에 면을 먹었다던데 이북만큼 춥지 않은 서울에서도 그런 정취가 제법 난다. 함께 나오는 무김치를 입에 넣으면 더 좋다. 기다린 만큼 면기가 앞에 놓일 때의 기쁨은 크다. 젓가락을 대기 전에 양손으로 면기를 들어 육수를 두어 모금 마시면 가게에 따라 다르지만 속이 편안하고 시원한 느낌이다. 면을 적당히 풀어 편육과 함께 한 젓가락 베어물면 그만한 행복이 없다. 일행이 있다면 만두를 시키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다. 언젠가 취직하면 어복쟁반을 먹으리라 다짐했건만 코로나19 상황도 그렇고 작년 내내 냉면을 먹으러 간 일 자체가 드물다. 짬뽕 국물까지 모두 마시는 걸 완뽕이라고 한다던데 나 역시 평양냉면을 먹을 때면 설거지하고 난 것처럼 깨끗한 그릇을 남기는 걸 좋아한다. 그러다 보면 빈 그릇만 남는 것처럼 내 근심 걱정도 이내 사라지고 내면의 평화를 마주할 수 있다.

 

면 얘기를 하고 나니 파스타가 생각난다. 혼자 집에서 해먹는 파스타도 좋지만 내 맛집 지도에는 여러 파스타가게가 올라있다. 그 중에서도 손에 꼽는 가게는 주말에만 영업하고 수요일에 인스타그램에 메뉴를 올려 문자/전화로만 예약을 받는 낙산공원 자락에 있다.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을 때는 발걸음을 계속해 공원 전망대에 올라본다. 한양도성 성곽길과 면해 있는 터라 나름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가게의 매력은 늘 제철의 좋은 재료로 아낌없이 푸짐한 양을 담아주시는 데 있다. 거기 더해 음식 솜씨만큼이나 입담이 좋으신 사장님 부부의 유쾌함도 한몫할 것이다. 내 인스타그램에 가장 많이 올라가 있는 가게가 아닐까 싶은데 19 임용을 서울로 응시한 것도 매 주말마다 당시 만나던 사람과 이 가게를 함께 찾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은 쓴웃음이 남는 이유지만 그만큼 이 곳의 파스타는 특별하다. 호탕한 사장님의 웃음과 넘치는 인심, 기본에 충실한 맛이 예전에 냉이트러플파스타를 맛본 친구 표현을 빌자면 이태리 할머니의 우직한 손맛이 느껴진다. 이탈리아 가정식을 딱히 맛본 적은 없지만 그 훈김과 온기가 세상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두 종류의 면 얘기를 하고 나니 라멘 생각이 났다. 아니 그보다도 이 글의 주제가 딱히 내가 사랑하는 면이 아닌데. 그럼에도 면의 방계이면서 내가 늘 수원의 자랑 수원의 보물, 한강 이남 최고의 만두집이라 자부하는 <연밀>이 더 강렬히 떠오른다. 2016년 여름에 처음 발견한 이 가게는 2021년 현재 가게 차림표의 모든 음식을 먹어봤다는 것으로 그 매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식탁 가운데 놓인 찜기를 열면 모락모락 김을 내는 육즙만두를 조심스레 젓가락으로 앞접시에 옮긴다. 설레는 마음으로 피를 찢고 젓가락으로 지긋이 누르면 모습을 드러내는 황홀한 육즙을 영접한다. 그릇을 들어 마시고 육즙이 빠진 만두를 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마무리는 짜사이나 단무지로 입가심해주면 좋다. 빙화만두는 어떻고 찐만두는 어떻던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양고기찐만두는 세상에 이 맛을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하나씩 먹여주고 싶다. 하도 문턱이 닳도록 가게를 들르다 보니 명절이면 사장님께서 보낸 중국어 명절인사를 구글 번역을 돌려 답장하곤 한다. 저번 추석에는 중추절이라고 맛있는 월병을 선물받았다. 수원 근처에 친구들이 놀러올 때면 빠지지 않고 가는 이 가게의 만두는 정말이지 은퇴 계획으로 레시피를 배워서 나중에 창업을 하고 싶을 정도다.

 

본래 소울 푸드는 서아프리카 요리에서 출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식문화를 가리킨다. 그렇지만 원용하자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고 영혼을 채워주는 것 같은 음식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사용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19년부터 줄창 빠져있는 마라탕과 마라샹궈 같이 중독적으로 자꾸 생각나는 음식도 좋지만, 평양냉면, 파스타, 만두처럼 언제나 먹고 싶고 뒤돌면 생각나는데 마음 깊숙한 곳부터 차곡차곡 채우며 계속 삶을 이어갈 힘을 준다. 다가오는 새 학기, 업무분장이 뜻대로 되지 않아 속상하지만 그 또한 내게 주어진 몫이라 생각한다. 힘에 부칠 때면 시간을 비우고 훌쩍 떠나 내 영혼을 채우는 음식과 마주하며 다시금 헤쳐나갈 힘을 얻고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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