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교사의 신정은 삼일절이다. 送舊迎新, 묵은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는다는 새해의 본질을 생각하면 업무와 학년이 정해지는 2월은 그야말로 옛 것은 가고 있는데 새 것이 아직 오지 않은 어정쩡한 시기이다. 익히 떠들고 다녔지만 희망 업무도, 학년도 튕긴 사람은 심지어 짐까지 쌌다. 작년에 새로 바꾼 책상과 서랍 등 사무공간을 떠나 최소 10년은 넘게 쓴 것 같은 삐걱대는 집기들이 가득한 학생부실로 말이다.

 

작년과 동일하게 유임을 희망했는데 우선 업무가 인권담당, 학교폭력 책임교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3학년을 맡을 경우, 3학년 담임들을 모두 본교무실에 배치해 의사소통의 신속성을 높이려는 공간 배정의 취지에 맞지 않게 되었다. 학생부로 이사가게 된 이상 자동으로 1, 2학년 중 선택해야 하는데 작년 첫 발령 때 희망학년이 2학년이기도 했어서, 그렇게 2학년 담임이 되었다. 이제 겨우 익숙해진 3학년 교과서, 방송 업무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 속이 쓰리다.

 

작년 생각하고 후관 1층이네. 춥겠네 정도만 생각했는데 잊고 있었다. 신입학하는 1학년들 중 통합학급 학생을 위해 교실 배치를 바꾸기로 했었다. 결론적으로 내 담임반 교실은 후관 3, 엘리베이터로 닿지 않는 곳이다. 덕분에 학급문고를 옮길 때 딱 3층 계단 앞에만 수레를 두고 세 번에 걸쳐서 시야 겨우 확보할 정도로 쌓은 책을 들고 옮겼다. 그래도 작년 교실은 내진설계 때문에 운동장 쪽 창가의 절반이 가려져 있었는데, 올해 교실은 비록 본관에 가리긴 해도 해가 높이 뜨면 햇살이 온 교실에 쏟아진다.

 

또 학생부실에서 가까운 것도 장점이다. 작년에는 교무실에서 가장 먼 교실이었는데 그래도 내 업무 공간과 인접할수록 담임반을 살피기도 편할 것이다. 작년처럼 등교 시간 20분 전부터 교실에 가서 음악과 함께 학생들을 맞아야지. 이 밖에도 본관은 잘 나오지 않는 온수가 후관은 콸콸 나온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본관보다 추운 건물이라 열어준 게 아닐까? 설 연휴 직전에 교감에게 전화를 받아서 업무분장 발표 날보다 열흘 정도 먼저 알게 되니 그 간 마음의 준비를 어느 정도 하고 시작하는 듯하다.

 

물론 이사도 아직 안 끝났는데 개학식/시업식 날 학교폭력예방교육 준비, 배움터지킴이 재위촉 관련 내부기안, 학교폭력전담기구 구성, 학교안전 체크리스트 외부 공문 발송 등 한번에 일이 몰아쳐오니 어질어질하다. 그래도 기필코 정시퇴근하겠다는 마음이었지만 금요일은 담임반 학생들 학급 단체카톡방과 구글클래스룸에 초대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멀티태스킹을 해야만 했고 떨어지는 효율에 결국 10분 늦게 퇴근했다. 덕분에 안 막힐 때면 40분 안쪽으로 걸리던 직장-본가 자차 귀가 시간이 1시간 반 가까이 걸렸다. 차를 진작에 샀더라도 자취가 옳은 선택이었구나 다시금 깨달았다.

 

결국 퇴근 후, 주말에는 절대 학교 일을 하지 않고 푹 쉬겠다는 나의 다짐이 무색하게 오늘 결혼식에 참석 차 대구에 가면서는 교과서 pdf를 굿노트로 밑줄 치고 필기하며 수업 준비를 했다. 대구에 가서는 스타벅스에 앉아 보호자에게 보내는 담임 편지를 완성했고, 결혼식 마치고 본가 와서는 동학년 나눠 들어가시는 부장님이 제작하신 학습지를 검토하고 내가 맡은 학습지를 만드는 중이다.

 

새 학년 새 학기를 조금 여유롭게 맞아보고자 신청했던 업무 희망원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건 속상한 일이지만, 동시에 내가 현임교를 떠나지 않기로 결정한 데 따른, 그리고 신규 발령 교사를 위한 업무 배치이기도 하니 그리 억하심정은 들지 않는다. 배려받아야 하는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1년이나마 먼저 교직경력이 있는 사람의 자세겠지. 기간제 경력이 있을 때는 매년 근무교를 떠나는 선택을 했기에 같은 학교에서 2년째를 맞이하는 것은 처음이고 낯설다. 두려움이 설렘이 될 수 있도록 나를 믿고 동료를 믿고 차근차근 준비를 마쳐야겠다.

 

 

'소소한 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와의 불화>(4월 1주)  (0) 2021.07.22
<영혼을 달래는 음식>(2월 3주)  (0) 2021.07.22
<봄>(2월 1주)  (0) 2021.07.22
<마음을 돌보는 일>(1월 3주)  (0) 2021.07.22
<2020년 매듭 짓기>(12월 4주)  (0) 2021.07.22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