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두 번씩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때가 있다. 명절상여금이 들어오는 설과 추석은 돈 나갈 일도 많지만 빨간 날과 함께 보너스가 찾아온다는 점이 곱절로 반갑다. 취준생활 동안 모처럼 얼굴을 마주한 친척들이 안부를 물을 때면 어색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려야 했던 것도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올해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모이지 않는 것이 권장되다 보니 친지들이 한 집에서 흥성흥성하는 분위기는 느끼기 어려울 테다. 명절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문학작품은 백석의 이다. ‘나’는 ‘엄매 아배’를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온 가족이 큰집에 가는 명절날로 시작하는 이 시는, 신리에 사는 고모를 시작으로 한 명 한 명 큰집에 모인 친척들을 호명한다. 이어지는 설빔..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도 40일 밤낮으로 비가 왔다는데 2020년 여름의 공식적인 장마 기간은 46일이다. 지겹도록 계속되는 빗소리와 눅눅한 공기, 이 세상의 삼라만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건 장마 시작 전 한 통에 삼천 원 남짓이던 양배추가 오천 원을 훌쩍 넘은 가격표를 보고서였다. 가뜩이나 코로나19 때문에 바깥 출입이 봉쇄된 차에 방에서 찾는 혼술이 늘고 나의 삶이 지루하다 보니 타인의 삶을 엿보는 SNS 활동도 늘었다. 페이스북 피드를 내리던 중 내 눈을 붙잡은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폭우로 범람한 강 주변의 도시가 온통 침수된 광경 위의 한 문장, “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번 코로나19와 같이 전지구적 돌림병이 아니더라도 지속..
여름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몸의 열이 사시사철 끓어올라 한겨울에도 좀만 움직이면 송글송글 땀방울을 달고 사는 나다. 그런 내게 더군다나 들숨과 날숨 모두 훈김이 끓어오르는 때란 아무리 차분하게 마음을 먹으려고 해도 화와 짜증에 주도권을 내주기 십상이다. 게다가 여름 쿨톤의 희디 흰 피부를 자랑하는 내게 여름은 피하고만 싶은 계절이다. 물론 내 뜻과는 상관 없이 태양과 지구의 움직임에 따라 열매 맺는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렇다고 해도 여름이 덥지 않으면 그 해 과일도 맛이 덜하고 수확량도 시들한 냉해가 온다. 애초에 열매의 옛 표기는 여름, 여름은 열매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한껏 치솟아 내리쬐는 태양 아래 걷노라면 등이고 가슴이고 할 것 없이 흠뻑 젖고 만다. 곡식이 한번에 익지 않는 것처럼 매..
자본가 또는 건물주, 실업자가 아닌 이상에야 누구나 하루의 삼분의 일 이상을 노동자로서 보낸다. 따라서 노동환경의 질은 곧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노동삼권을 배우는 사회 교과서에도 노동삼권의 주체가 ‘근로자’인 것은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고 심지어 ‘Ministry of Labor’가 앞에 꼴사납게 ‘고용’ 두 글자를 붙이고 있으니 어쩌면 노동에 대한 인식은 그 사이 뒷걸음질 친 건지도 모르겠다. 남성이 헤게모니를 쥔 만큼 여성부의 존재 의의가 분명하지만 남성부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이재용을 비롯해 재벌 총수들로 대표되는 총자본의 지배력을 날마다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모든 부처가 고용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일치단결하는 중에 ‘고용노동부’..
여양육자와 나는 어릴 적부터 갖은 일로 부딪혀댔다. 양육자들의 헌신적 보살핌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영유아기 역시 나의 불만족을 표현할 길이 그저 울음뿐이라 유달리 시끄러운 아기였다지. 남양육자가 내 성장 과정에서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본인의 내성적인 성격에 더해 양육이 여성의 영역이라는 성차별적 편견 때문이겠지만 상대를 떠나서 내가 보호자들과 꾸준히 충돌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갈등을 슬기롭게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본령이고 2인 이상이 생활하는 가정은 정치의 본산이 아닐까? 그런 가정에서 나이 서른을 넘겨서까지 독립하지 못한 죄로 복장에 대해 사사건건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왕복 세 시간씩 걸리는 통근길도 괴로웠지만 여양육자의 복장 관련 비난으로 대표되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가정에서 겪는 ..
급여일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노는 게 제일 좋은 걸로 보아 우리 모두 단군의 자손이 아니라 뽀로로의 아이들 아니겠냐고 농을 던질 때도 있지만 월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17일이 되면 다시금 힘이 난다. 돈이 일의 온전한 보람 그 자체는 아니지만 구성 요소들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그 덕분에 잘 알겠다. 땀흘린 노동의 대가를 납득되는 수준으로 손에 쥐고 일상을 꾸려나가는 것이 자아 개념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모른다. 저번 달의 소비내역을 점검하고 앞으로 다가올 지출들을 계산하느라 머릿속에서는 더하기 빼기가 쉴 새 없다. 할부와 교통비와 후원금과 각종 명목이 붙은 생활비를 제하고 나면 빠듯한 저축만 가능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에 따라 돈을 번다는 건 확실한 일의 기쁨이..
저번 주의 주제였던 ‘외로움에 대하여’와 잇닿는 이번 주의 주제를 내다 보았을 때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었다. 하지만 이것저것 재고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또다시 빈손으로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았다. 그렇지.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아야 더 힘차고 가뿐하게 손가락을 놀려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다. 자유로운 양손이 뇌에 바로 연결된 것이기라도 한 양, 사고는 곧바로 활자가 되어 화면에 나타난다. 호의, 성적 열망, 동정심, 배려, 선망, 동경, 존중, 다정함과 같은 여러 관념들과 교차하는 회색 영역을 가지는 단어, 바로 ‘사랑’. ‘사랑’이라는 두 음절 단어를 소리내어 입 밖에 낼 때면 혀끝이 잇몸을 정확히 두 번 두드린다. 크게 벌린 입, 평평하게 벌린 입술 끝에는 약간의 두근거림이 걸려 있다. 이 ..
외로운 것이 외로운 거라고 장기하가 그랬다. 쌍둥이가 아닌 이상 인간은 착상한 순간부터 첫 울음을 울기까지 쭉 혼자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더라도 죽음을 누군가와 함께 맞이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홀로 있는 것은 삶의 기본값인지 모른다. 아니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손수 밥을 차릴 때도 도마 위에 썰고 팬 위에 볶는 식재료는 타인의 땀방울이 깃들어 있을 터. 몸과 마음이 아플 때 역시 자신 외의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상하다. 분명 시작과 끝은 혼자가 분명한데 중간은 혼자일 수 없고 혼자이어서도 안 된다는 게 말이다. 주중에는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그다지 없다. 파티션 너머의 동료들과 간식을 주고받고 부재 시 전화를 당겨 받아주며 점심시간에는 함께 밥을 먹으러 간다. 온라인 ..
청각이 예민한 사람은 남들이 쉽게 지나치는 소리들을 줄곧 귀에 주워담는다. 가로수에 깃든 새의 울음, 교실 구석의 소곤거림, 오래된 전등의 떨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다 보면 주위에서 왜 그렇게 과하게 반응하냐고, 난 안 들리는데 네가 너무 까탈스러운 거 아니냐고 핀잔 받기 일쑤다. 이 때 이미 알았나 보다. 종교를 비롯한 도그마에 대한 꺼림칙함을 말이다.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는 성경 말씀은 폭력적이다. 유교도 마찬가지. 학문 수양의 당위성을 전하겠답시고 청각장애인 얘기를 무신경하게 하는 것 자체가 너무 고루하다. 시끄러움에 고통받으면서도 그와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은 일상이다. 그렇지만 의식 여부와 무관하게 깜짝 놀라거나 불쾌함에 몸서리치는 것은 내 의지 밖의 일이다. 이런 순간이 계속되다 보면 차..
어느 노랫말처럼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불려왔다. 내게 삶과 이름을 준 원가족과 최초로 분리되는 경험을 한 것은 대학 입학 때부터이다. 일정한 거처 없이 이 기숙사와 저 자취방을 전전하다 보니 지금도 주소보다는 행정구역의 이름으로 공간을 기억하곤 한다. 원가족과 함께 하던 시기의 제일 오래된 기억은 취학 전, 동생이 아직 영아였던 어느 빌라에서의 일이다. 그 날은 흐리고 어두웠다. 아버지가 한창 일터에 있었을 시간, 동생은 아기방에서 통잠을 자고 나는 어머니와 마주앉아 학습지를 풀고 있었다. 학습지 이름은 곰돌이,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한글과 산수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 뒤로도 눈높이, 빨간펜과 같이 학습지 이름만 바뀌고 주마다 해야 하는 공부는 계속됐다.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