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가 태어나서 박이나 외처럼 한 지방에 매여 사는 것은 운명이다. 천하를 두루 구경하여 자기가 지은 시문들을 쌓아 놓지 못할진대, 제 고장의 산천쯤은 마땅히 둘러보아야 할 것이다." 김일손 「두류기행록」 김일손이 내가 아는 그 「조의제문」이 김일손이 맞다면 조선 전기 사람이니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오늘날 교통과 통신의 발달을 생각하면 돈과 시간과 건강이 허락할 때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말이다. 아 그것도 코로나19 대역병 시대를 맞아 국가들 간 빗장을 잠그고 벽을 높여서 해외여행의 기억이 전생의 일처럼 아련한 것도 사실이다. 오너 드라이버가 된 뒤 직장까지 왕복 거리가 이사 전에는 5킬로, 이사 후에도 7킬로인 걸 생각하면 인수 후 주행 거리에 7천 킬로를 더한 것은 퇴근하고 나서나 주..
파를 하얗게 씻어서 쌓아 놓은 매운 추위여 『바쇼의 하이쿠』 소한이 저번 주에 지나갔지만 여전히 추위가 매섭다. 지하주차장이 있는 집에 살 때는 몰랐었는데 야외에 주차해놓으니 차 안에 싣고 다니는 생수병이 꽝꽝 얼어서 유사시에 둔기로 쓰기에 손색이 없다. 추운 날씨 탓을 하며 달리기를 쉰 지 두 달이 가까워져 가니 슬슬 초조함이 올라온다. 사실 2020년 초에는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든든하게 입고 마스크를 쓴 채 아침마다 꼬박꼬박 달렸었는데 역시 우울감이 심하니 몸 움직이기도 버거운 걸까 싶다. 끔찍한 일이 있었다. 우선 벌어진 사안의 심각성도 심각성이지만 무엇보다 힘든 건 몇몇 이들의 태도였다. 그 행동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럴 만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 잘못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
두려워 벌벌 떨며 조심하기를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하듯 하고 살얼음을 밟고 가듯 해야 하는 것을. 『시경』 삼가고 또 삼가야 하는 걸 모르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다 자신과 타인을 파괴하는 이들을 보면 구역질이 난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은 해야겠지. 친구가 쇼펜하우어의 글을 보내줬다.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사람까지도 존중하라. 모든 사람 안에는 우리 안에 사는 영혼과 똑같은 영혼이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혐오스럽더라도 '세상에는 온갖 사람이 다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라. 그런 사람에게 혐오감을 드러낸다면, 첫째로 정의롭지 못한 것이고, 둘째로 그들에게 결사적인 싸움을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어떤 사람이건 인간은 쉽게 자신을 바꿀 수 없는데,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우리와 싸우는..
"존귀하게 되는 까닭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는 그 존귀함을 영원히 잃지 않는다." 사마천 『사기 열전』 「세계인권선언」에서 이미 천명한 바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못난 면은 그런 공리를 비웃으며 존중받아야 마땅한 사회적 약자를 타자화하고 폭력을 일삼기도 한다. 내일 마침 1교시 없어졌으니 출근해서 가해 추정 관련 학생들 다 불러다놓고 조사하고 사안 보고해야지. 조사 마치는 대로 교장에게까지 공유하고 화요일에 전담기구 열어서 개최 요청 해야겠다. 하다하다 장애 학생을 괴롭히다니 비열한 인간들.. 생각 같아서는 학교 밖으로 쫓아내고 싶다. 의무교육이라 그럴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 이번 일에 대한 조치를 계기로 내면은 몰라도..
도는 텅 빈 그릇과 같아, 아무리 채워도 채울 수 없다. 노장의 텍스트 자체가 숱한 역설로 이루어져 있지 않나. 당장 첫 머리가 그 유명한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니까. 삶에 숱한 역설이 존재하기에 그런 텍스트들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생활은 온갖 모순으로 가득하고 그런 모순들에 덤덤해져 가면서 하루하루 성숙해가는 게 아닐까. 물론 성숙의 끝은 육체적, 정신적 노화로 이어지고 일종의 정상성 획득에 관한 기준에까지 정점을 찍고 그 이후로는 하락하는 거라고 볼 수 있겠지. 무수한 역설로 가득한 삶은 어차피 끝나기 전까지 지속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발버둥친다. 이왕이면 그 과정이 덜 괴롭고 더 행복하면 좋겠지. 최대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으며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는 사람이..
겨울바람이여 볼이 부어 쑤시는 사람의 얼굴 - 『바쇼의 하이쿠』 오늘의 일력 문구는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로 먼저 접한 마츠오 바쇼의 하이쿠다. 하이쿠 하면 자연스레 향가를 떠올리고 저번 학기에 3학년 시 수업에서 「제망매가」, 「서동요」를 수업했던 기억으로 흐른다. 재작년처럼 올해 다시 3학년을 맡게 되더라도 시수 배분을 어떻게 할지 불확실하니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고려해서 준비해야겠다. 여전히 교사 네 명에 16학급이니 64시수를 4로 나누면 16시간씩 하게 되겠지. 이때 아예 제가 18시수 할 테니 남은 46시수를 잘 조정해보시라 하고 싶은데 그게 될지 모르겠다. 작년에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어필했는데 그렇게 하면 1, 2, 3학년 걸치는 사람이 생기길래 단념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상황이 되..
"백성은 나와 동포요, 생물은 나와 함께한다." - 장재 「서명」 사해동포주의 같은 건가 하고 글쓴이와 글 제목을 검색했더니 송대의 사상가고 '서명'의 '서'는 West, 일종의 좌우명 같은 의미였다. "(자기 자리) 서쪽에 붙여두는 글"이라는 의미이고 보통 집을 남향으로 짓는다고 생각하면 서쪽은 앉은 방향의 오른쪽이 된다. 그러니까 좌우명이라고 해석해도 별 지장은 없을 것이다. 그는 '선우후락'이라는 문장으로 유명한 송대의 정치가 범중엄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여러 저작을 남겼는데 '주자'로 알려진 남송의 유학자 주희가 그의 책을 해설하기도 했다니 처음 들어보지만 동양사상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인 것 같다. 원문과 해석을 찾아보니 하늘과 땅을 부모로 삼으며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에 대한..
12월 1일(음) "과거의 문장들은 비록 오래된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무궁무진한 의미들을 체득하게 되면 나날이 새로운 것을 계발할 수 있을 것이다." 『문심조룡 』 내 일은 학생들과 함께 과거의 문장 속에서 의미를 찾아 현재를 이해하는 동시에 미래를 열어가는 도구를 갖추도록 돕는 일이다. 지난 시간 속에 갇힌 텍스트가 먼지를 뒤집어쓴 화석이 아니라 생동하는 오늘일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삶의 진실을 찾아 자신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한 수용하고 각자의 지금을 살아가는 힘을 키워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