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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상

맥주 한 잔

쫑티 2019. 12. 15. 07:58

조금 늦게 귀가하면 보통 여양육자께서 물으신다. "술 마셨니?"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정말이든 아니든 간에 정해져 있는 편이다. "네. 맥주 한 잔 했어요." 실제로 맥주 한 잔을 했든, 소주 두 병을 마셨든 같은 대답을 하는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술 때문에 끼친 걱정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명절 때 친척 어르신들이 권하시는 술을 마신 걸 제외하고 가장 처음 취한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였던 순간은 아마도 2008년 2월일 것이다. 12년 간의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고 적이 없는 상태가 되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 지금은 사라졌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름 끈끈한 유대를 자랑했던 만화동아리 선배들은 후배들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지금은 롯데리아로 바뀐 아주대 정문 근처의 <춘천닭갈비>에서 반주로 시작해 <이브노래방>에서의 캔맥주를 거쳐 <술래잡기>에서 소맥을 말고서야 귀가했다. 당시 본가는 아주대에서 도보 20분 정도 거리, 이렇다 할 통금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날짜가 바뀌기 전에는 귀가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던 가정의 평화를 깨지 않기 위해 근처 사는 친구들과 바지런히 걸었다. 집에 무사히 도착해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안방 문 앞에서 인사와 함께 풀썩 쓰러져버린 게 문제였다. 다음 날 지끈거리는 머리를 안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보니 여양육자께서 콩나물국을 끓이고 계셨다. "내가 네 아버지 해장국도 끓여본 일이 없는데 아들내미 해장국을 끓이게 될 줄은 몰랐구나." 하시는 말씀과 함께. 술을 못하시고 즐기지도 않으시는 양육자들 밑에서, 심지어 동생도 술을 즐기지 않는데 어쩌다 나 같은 종자가 나타난 걸까.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술 관련 사고가 있었지만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는 역시 새내기 떄 12 엠티에서 지금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모 선배가 동기들 붙잡고 술 먹이는 거 막겠다고 둘이 먹다가 만취하고 밖에서 혼자 넘어져 앞니가 박살나 응급실 다녀온 일, 또 하나는 군 입대를 앞두고 내일로 타고 전국을 돌며 각지의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며 다니다가 대전에서 1차 세계맥주집 2차 중화요리에 고량주 3차 집에서 소주를 마시다 그 집 아버님이 담가 놓으신 인삼주까지 꺼낸 이후의 기억이 없고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던 일이다. 그 뒤로는 정말 나중에 돌이켜봤을 때 후회하지 않을 만큼만 술을 마셔아지 하고 다짐한다. 물론 잘 지켜지지는 않는다. 이쯤 되면 건강에도 좋지 않고 심지어 취하지 않았을 때라면 일으키지 않았을 실수를 하게 하는 술을 왜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마시는 것일까 나라는 사람의 학습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의식적으로 술을 멀리하려고 한다. 데이트할 때도 습관적으로 반주를 마셔대곤 했던 나지만 혼술도 가급적 하지 않으려고 하고 술 약속 자체를 먼저 잡지 않는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술을 마시려면 지금의 체력과 알콜 분해 능력을 탕진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음주를 위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왜 술을 그만 마실 생각은 하지 않느냐고? 술자리에서 사진 속 내 표정은 한 점의 흐림이 없고 응어리진 속을 씻어내리는 것이 술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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