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환경과 노동자>(8월 2주)
자본가 또는 건물주, 실업자가 아닌 이상에야 누구나 하루의 삼분의 일 이상을 노동자로서 보낸다. 따라서 노동환경의 질은 곧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노동삼권을 배우는 사회 교과서에도 노동삼권의 주체가 ‘근로자’인 것은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고 심지어 ‘Ministry of Labor’가 앞에 꼴사납게 ‘고용’ 두 글자를 붙이고 있으니 어쩌면 노동에 대한 인식은 그 사이 뒷걸음질 친 건지도 모르겠다. 남성이 헤게모니를 쥔 만큼 여성부의 존재 의의가 분명하지만 남성부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이재용을 비롯해 재벌 총수들로 대표되는 총자본의 지배력을 날마다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모든 부처가 고용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일치단결하는 중에 ‘고용노동부’라니, 노동자들에 대한 조롱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당장의 생활비를 걱정하면서 학업과 생계 노동을 병행해야 할 만큼은 아니었으니 나름 운이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학교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만큼 수업 중에 뜬금없이 노조가 과도한 요구를 하고 정치 투쟁을 하는 통에 나라가 어렵다는 둥 노동 혐오의 목소리를 높이던 학년부장 역사 교사가 떠오른다. 첫 노동 경험은 두 번째 수능을 마치고 지금은 폐업한 모 백화점 지하에서였다. 오픈조는 9시 반부터, 마감조는 12시부터 8시간 일했다. 당시의 최저 시급보다 30원 더 주는 것에 감사해하며 종일 서서 다리가 붓고 호객하느라 목이 쉬어도 공부 이외의 일, 그것도 생산성 있는 뭔가를 하고 있다는 체감에 흐뭇해서 육체/감정 양면의 노동의 피로는 별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지나 이듬해 섣달까지, 급료를 받는 첫 일은 노동환경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남기지 못하고 지나가버렸다.
그 뒤로도 입대 전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학교에서 버스로 40분 가량 떨어진 학원에서 중학교 사회 수업을 하던 날들이 있었다. 입대 전후로는 학생복지과에서, 학교 박물관에서, 도서관에서, 과사무실에서 매 학기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며 월 30시간, 15만원의 급여를 받는 등 돌이켜 보면 언제고 노동환경 속에 있었지만 스스로를 노동자로 정체화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두 번의 교육실습을 거쳐 어느덧 졸업이 다가왔고 임용시험에서 낙방한 직후 일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본가 근처 학교 몇 군데에 기간제 원서를 넣었다. 운 좋게도 졸업 전에 한 학기 자리를 구했다. 그 와중에 졸업식 날과 신입교사 워크숍이 겹치는 바람에 졸업식 중간에 허둥지둥 출발해 아버지 차로 서해안의 어느 펜션에 도착했다. 지금에야 어지간히 규모 있는 회사는 정식 계약 전 실시하는 교육 등 구직자의 시간을 필요로 할 때 내규에 따른 임금을 지급한다는 걸 안다. 그러나 사회생활 경험이 적었던 당시의 나로서는 그런 걸 몰랐다. 함께 일하게 된 기간제 동기들, 관리자와 동행한 부장들과 함께 족구와 회식을 하고 다음 날 오전에 함께 사우나까지 다녀오면서 쉬는 것도 일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 애매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다행히 기간제 교사로 일했던 학교들의 노동환경은 나쁘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지시를 하는 관리자도, 수업권을 침해하는 학생이나 보호자도 없었다. 업무 면에서는 그랬지만 그 외 면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감내해야 하는 부분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 파편처럼 일상 속에 뿌려져 있었다.
우선 미션 스쿨이었기에 매일 아침 교직원예배가 있었다. 지원서에 무교라고 적었지만 혼자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예배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관리자부터 기간제교사까지 예배를 이끄는 순번이 있었고 어떻게 하면 무난한 기도문을 쓸 수 있을까 구글링해보기도 했다. 그나마 첫 학교는 출근 시간 이후에 시작했지만 그 다음 학교는 수요일마다 08시까지 출근하고 같은 재단의 전 교사가 교정 중앙에 있는 교회에서 모여 목사의 설교를 들어야 했던 걸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휴대폰 본다고 지적 받은 뒤로는 아가서를 펼쳐놓고 애인 생각을 하면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또 복장 면에서 부당한 간섭이 있었다. 학기 초에야 의례적으로 정장 내지 캐주얼 정장을 입고 출근했었다. 그렇지만 여름 한가운데서 가뜩이나 몸에 열이 많아 늘 땀범벅이 되고 마는 터라 가볍고 시원한 옷을 입고 출근했더니 “어디 여행이라도 가느냐.”, “학생들이 보기 좋지 않으니 단정하게 칼라가 있는 셔츠를 입는 게 좋겠다.”는 식으로 복장에 대한 고나리질을 겪어야 했다. 관리자야 그렇다 치고 후자는 나름 의지했던 동 교과 부장에게 듣고 나니 조금 얼얼한 기분이었다. 차별과 혐오의 글귀가 적힌 옷도 아니고 그냥 조금 화려한 패턴의 셔츠를 입었다고, 라운드 티를 입었다고 복장에 대해 지적받을 일인가. 내가 정교사여도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불쾌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건 고용형태가 어떻든지 간에 납득할 수 없는 일종의 위계폭력이었다.
끝으로 업무상 만난 공적 관계를 은근슬쩍 사적 모임의 탈을 쓰고 연장시키려는 상사들이 있었다. 관리자-부장교사-평교사의 단순한 체계를 가진 교무실에서 상사라기보다는 선배라는 말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 야근 전 저녁을 같이 먹자는 줄 알았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함께 택시를 타고 부장 집 근처 삼겹살집에서 소맥으로 시작해 2차 세계맥주, 3차 노래방, 4차 족발집, 5차 24시간 중국집을 거쳐 귀가하니 금요일 오전 3시 30분이었던 날이 생각난다. 술을 좋아하지만 금방 취하고 자꾸 술을 강권하고 심지어 주취폭행 전력이 있는 터라 아무도 부장과 술자리를 함께 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상대적으로 거절하기 어려운 기간제교사, 그것도 뒤탈이 적을 것 같은 남교사들을 불러 술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같은 부서에 있었으니 불러낼 핑계는 많았고, 박원순 씨가 업무와 무관한 사진을 부하 직원에게 보냈다는 기사를 보고 나서 최근 다시 그 부장이 떠올랐다. 사수와 나를 초대한 단체카톡방에 밤 11시가 넘었는데 혼자 외롭게 오징어회에 소주 마시고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술상 사진과 함께 올리거나 주말에 낚시를 다녀온 사진을 올렸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것에 ‘직장갑질’이라는 정확한 명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해에 만난 기간제 동기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고 일년에 한번씩은 만나 안부를 나누고 서로의 삶을 나누지만 그런 부장과는 단 한 순간도 더 말을 섞고 싶지가 않다. 다음 학교의 3학년부장도 이와 비슷하게 기간제교사들을 데리고 술 마시면서 형님 동생 놀이를 하고 싶어하는 데 주위에서도 또 이를 호응해주는 분위기였다. 그런 문화가 너무 싫어서 처음 멋 모르고 참석한 뒤로는 선약이 있다 거절해도 밤 11시가 넘어가면 전화가 오길래 무시하고 안 받았더니 쾌적해졌지만 이건 내가 재계약에 대한 기대를 처음부터 갖지 않아 아무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고, 고용 불안정에 시달리는 입장에서는 이런 선택지가 애초에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교사가 되어 이전과 비교할 때 노동환경이 개선되었는지를 묻는다면 바로 대답하기 어렵다. 교사 업무의 양대 축은 교과 지도와 생활 지도라고 생각하며 교직을 준비했지만 실제로는 행정 업무에 교사의 삶이 종속되어 있지 않나 의심이 든다. 교육과정과 교재를 연구하고 동료들과 수업에 대한 고민을 나눌 시간보다는 교실과 복도의 방역 상황을 점검하느라 바삐 돌아다니고 가정에 발송한다는 농산물 꾸러미 수요 조사로 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있을 때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수업을 후순위로 미루고 내 체력과 정신력을 보존하거나 내 체력과 정신력을 포기하고 무료 초근을 하면서 수업을 준비하거나. 그나마 이런 선택지가 있는 나는 행운아일지 모른다. 학폭을 비롯해 과중한 기피 업무를 맡은 친구들은 하루 너댓 시간을 겨우 자면서 종일 사안을 처리하고 새로운 사안을 접수하고 회의 녹취를 푸느라 아예 교과서도 못 보고 수업에 들어가기도 했다고, 내가 교사인지 형사인지 모르겠다고 울먹인다.
교사가 행복해야 학생이 행복할 수 있다는 오래 된 금언은 교사뿐 아니라 매 순간 모든 곳의 노동자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더 나은 노동환경을 쟁취하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투쟁을 이어나갈 전 세계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경의를 보내며 나 역시 태업 또는 삶을 바치는 순간으로 함께 해나가고 싶다.